질보다 양? 양보다 질? 당연히 둘 다.


빠른 프로토타입과 지속적인 개선을 의미하는 이른바 ‘린 스타트업’ 방법론은 중독되기 쉽다. 하루라도 빨리 작은 목표를 달성하고 꾸준하게 반복해서 결과를 개선하고 나아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지표, 피드백, 다양한 성장의 표식은 인간을 너무나도 쉽게 매료시킨다. 제대로 창업을 경험한 창업자들이 창업에 자꾸만 손을 뻗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방문자 수, 가입자 수, 결제자 수… 이런 것들을 매일매일 차곡차곡 누적하다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세상 모든 걱정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한편, 그렇지 않은 방법론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와비파커의 창업자들은 회사 이름을 정하는 데에만 여러 달의 시간을 썼다. 그들은 창업을 결심했음에도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방식은 스타트업의 전통을 한창 벗어났다. — 이는 오리지널스라는 책에서 소개되는 대목인데, 이 와비파커라는 회사는 굉장한 이상치, 그러니까… 운이 좋아서 성공한 걸까?

운 뿐만은 아마 아닐 것이다. 우리는 중요한 과업을 미룰 때 그 과업을 계속해서 의식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일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약간의 응어리를 지닌채로 과업과 무관한 일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더 창의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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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가장 좋은 논문에 출판되게 만드는 요인 중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얼마나 많은 논문을 썼는가’ 라고 한다. 그러니까 논문을 학계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아무리 용을 써도 안될지도 모르지만, 여러 번 쓰다보면 걔중에 하나가 잘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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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 연금술사를 써낸 파울로 코엘료는 마흔 네 권의 책을 썼다. 마흔 네 권. 인간이 살면서 손으로 마흔 네 권의 글을 쓰는 게 가능했단 말인가? — 파울로 코엘료는 글 창작을 도와주는 언어 모델 AI를 사용한 것도 아니다, 그는 진짜로 거의 매일 글을 쓴 것이다. 매일 글을 쓰는 과정을 그는 고통스럽다 말했다. —

“내가 책을 빨리 쓰는 이유도 멈출 수 없어서다. 하지만 나는 미루는 것 또한 멈출 수가 없다. 내 내면에 깊숙이 뿌리박힌 오래된 의식인지도 모르겠다. 서너 시간동안 글을 쓰지 않는 데 대한 죄책감을 만끽해야 한다. 그래야한 글을 쓰기 시작할 수 있고, 쉬지 않고 쓴다.

낮에 4~5시간 동안 죄책감에 괴로워하지 않고 그냥 자리에 앉아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고흐는 10년동안 250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고흐는 자기 그림이 분명히 성공할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10년동안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고흐의 그림들은 그가 죽고 난 이후 세계 최고의 명화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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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문장들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누군가는 미루는 행위가 창의력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꾸준히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두가지 컨셉은 어떤 의미에서는 상충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둘 다 말이 된다.

예를 들어 1개월, 3개월, 6개월, 1년 같은 중장기 목표를 세우고 이 목표를 계속해서 마음 속에서 되내인다. 이 목표는 우리의 데드라인이 되어 우리의 머릿속을 끊임없이 점유할 것이다. 우리는 이 목표를 기한 안에 달성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이 목표는 대체로 터무니없이 원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목표를 달성할 것 같지 않다는 걱정, 고민이 우리를 자주 목표 달성에 더 가깝게 만들어준다. — 이 목표를 마음 속에 단단하게 지닌 채로, 매일매일 꾸준하게 목표와 연관지을 수 있는 뭔가를 쌓으면 된다. 기술을 연마해도 좋고, 독서를 많이 해도 좋고, 관계를 구축해도 좋을 것이다. 와비파커의 ‘회사 이름 짓는 데에만 몇 개월이 걸렸다’는 사례는 굉장히 이례적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들의 이야기에도 어떤 인과관계를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본업에 너무너무 충실해서, 본업에서 해낸 과업의 충실성을 마침내 쏟아낼 수 있을 때 제대로 시동이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 1개월 목표
  • 3개월 목표
  • 6개월 목표
  • 1년 목표
  • 5년 목표
  • 인생 목표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상상하면서 충실한 하루를 보내다보면 우리는 분명히 해낼 수 있다.

목표는 터무니없이 큰 것도 좋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진짜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포스트잇을 붙이고 글을 쓰고 말을 해야 한다. 그 말의 무게를 창의력의 원천으로 삼아서, 달성과 미달성의 판가름을 당근과 채찍 삼아서라도 생각을 발전시키는 것이 좋다. 그렇게 1년, 3년, 5년, 10년 계속해낼 자신이 있다면 진짜로 무엇하나라도 바꾸지 않겠는가. 주변사람들의 생각정도라도 바꾸지 않겠는가. 저 사람은 매일매일 세상을 바꾼다고 말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들게한다면 약간의 성공일지도 모른다.

글에서 앞서 ‘꾸준함’의 효과성에 대한 증거로 논문 성공 사례와 원인을 짚었는데, 사실 논문은 한 편 쓰기도 어마어마하게 어렵다. 누군가에겐 쉬울수도 있는 일이나, 유의미한 가설, 정확하고 명료한 실험, 해설, 주장을 담는 일은 진짜로 쉽게 체화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논문을 꾸준하게 쓰니 논문으로서의 성공을 거둘 확률이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들으면 당연한 말 같지 않은가.

그러니까 우리는 질보다 양이 중요한지, 양보다 질이 중요한지를 따질 필요가 없다. 정답은 당연히 둘 다. 우리는 질 좋은 일을 계속해서 해낼 각오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일은 당연히 - 너무 당연하게도 어렵다. 그리고 바로 그 어려운 일을 해내야 하는 것이다. (쉬운 길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장의 논리가 암호화폐 채굴 분야에서 고안된 단어인 Proof of Work — ‘과업의 증명’과 비슷하다고 전재한다면 어려운 일에 더 큰 보상이 따를 것이다. 당신이 이미 부자이거나 당신 친구들이 부자라면 쉬운 길도 있을 것이다. Proof of Stake — 지분의 증명)

글에서는 심지어 매우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인 ‘운’에 대해서 제대로 다루지도 않았다. 그런 것들을 갖추고 난 다음에 운도 좋아야할 것이다. 그런데 그 운이란 것은 천차만별이라서 - 나의 가족과의 관계가 운일수도 있고, 나의 동료가 운일수도 있고, 시장 상황과 타이밍이 운일수도 있고, 투자 기회가 운일수도 있고, 경쟁자의 위기가 운일수도 있고… 너무나 많은 요인이 포함될 것이다. 세상에, 운이란 건 예측할 수 없다. 요컨데 투자자 한 명, 동료 한 명, 계약 한 건 같은 개별 요인은 예측할 수도 있지만 변수가 너무 많으니 우리는 그것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 ‘운’이라고 부르기로 한 것이다.

운을 맞이하는 방법은 그것이 찾아올 기회의 절대량을 늘리는 것, 그러니까 시도를 많이하는 것이다. 운은 여러가지 변수를 뭉뚱그린 말이므로, 이 변수, 저 변수에 응할 수 있는 시도를 전부 다 해야 마침내 기회가 왔을 때 ‘준비가 된’ 것이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쉬운 길을 찾는 대신에, 기꺼이 어려운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 이런 글을 쓰면서도 이 말을 지키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이 글은 며칠을 미루고 미룬 끝에 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며칠 사이에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머리를 굴려대면서도 결국 무언가를 써서 내놓았다. 지금 이 글의 내용은 지난 수십편의 글 내용 속에 이미 한 문장씩 들어있는지도 모르나, 현재에 이르러 가장 명료하고 읽기 쉽게 정리되었다. 그러니 지난 며칠간 쓴 글 중에서 가장 괜찮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글을 쓰는 내가 — 글에 그치지 않고 이 말의 결심과 배움을 계속해서 지켜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아직 나는 진짜로 어려운 일을 해낸 것 같은 그 기분을 모른다. 그러나 하루하루의 충실함과 만족감은 어렴풋이 이해한다.

그리고 시작과 과정, 결과 그 어딘가에서… 어려운 작업의 증명에 기꺼이 나서는 모두를, 나는 진심으로 응원한다.

미래는 언제나, 무수히 많은 찰나(현재)의 점으로부터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