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은 부지런함의 해


삶의 모든 과정에서 글을 많이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구를 은연중에 가지고 있었다. 일기를 많이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며, 언제는 책을 출판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블로그 포스팅을 자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 이뤄낸 것들도 있으며, 그러지 못한 것도 있으며 그러지 않는 것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내 삶을 살아온 건 온 세상에 오직 나 하나뿐이니, 내 삶에서 누구보다 가장 정성껏 살아온 나를 생각하면서 한 해를 마무리할 때 즈음이면 나는 늘 그 해에 무엇이 있었는지, 그리고 다음 해에는 무슨 일이 있었으면 좋겠는지 여러 무더기의 생각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낸다.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적어온 일기를 모아서 한 해의 회고를 썼다. 그러고 나면 10년의 회고를 모아서 10대의 회고를 썼고 이젠 20대의 회고를 채워가면서 살고 있다.

벌써 작년이 되어버린 2021년은 이해의 해였다. 어떻게 하면 남들에게 더 잘 이해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남들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열심히 고민하던 해였다. 물론, 남에게 온전히 나를 이해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마치 온 세상을 척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나를 덜 감추려고 하고, 솔직해지려 하고, 나 또한 타인을 이해해보고자 노력해봤다.

그해의 시작 즈음에 내가 적었던 ‘2021년의 슬로건’은 대략 이렇게 시작한다.

이해받는 것이 모든 것이라면, 투명해지고 솔직해지더라도 남을 괴롭게 하지 않으며 나를 이롭게 할 수 있다면. 나를 올곧게 바라보고 알아줄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늘어날 수 있다면. 그래서 더 바라는 것이 없고 두려운 것도 없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
2021년은 이해받기 위한 노력의 해.
사랑하기 위한, 사랑받기 위한 준비의 해.
그래서 언젠가, 단지 이해받기 위한 인생의 끝을 맞이하자.

해의 시작에 나는 ‘이해’의 정의를 ‘내가 이해받는 것’이라는 수동적인 의미로만 상상했지만, 계절이 지남에 따라서 ‘이해’의 정의는 ‘남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는 능동적인 의미로 바뀌었다. 남의 행동을 비판하고 이지타산이나 여러 종류의 선을 그어 생각하지 않고 남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자체를 생각하는 시간을 보내려 했던 것 같다.

‘사랑’이란 말은 왜 썼던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마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거나 내가 온전히 이해받는 건 어차피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지만,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거나 사랑받는 것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고 생각했기 때문인가보다. 나는 어쩌면 사랑을 ‘이해’의 해답이라고 처음부터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가족을 사랑한다거나 동료를 사랑한다거나 친구를 사랑한다거나 애인을 사랑한다거나 하는 그 흔하고 어쩌면 너무 뻔한 포괄적 정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인제 와서야 인정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해의 끝에도 여전히 참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이 슬로건의 마지막 구절인 ‘단지 이해받기 위한 인생의 끝을 맞이하자.’ 였다. 나는 그동안 타인의 평가에 너무 목매고 살아왔던 건 아닐까 생각했다. 남의 눈에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남의 눈에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남의 눈에 모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남에게 남에게 나를 자꾸만 빼앗기고 누군가에게로부터 출발한 트라우마와 불안, 두려움 같은 것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반복했다.

나는 이제 ‘이해받기 위한 것이 아닌 삶’을 그린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무얼 잘하는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를 누가 이해해주지 않아도 괜찮은 삶을 그린다. 타인을 의식하는 나의 태도와 무관하게 어차피 누군가는 나를 미워하고 좋아할 것이다. 어차피 누군가는 나를 비판하고 칭찬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2021년은 정말이지 더할 나위 없이 성공한 셈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자기 평가에 되게 후한 사람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나를 후하게 평가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평가하겠나, 어차피 나의 삶은 남에게 후한 평가를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니, 내가 나를 누구보다도 더 잘 인정해주기로 하였다.

그것이 정신 승리가 되었건 지나치게 주관적인 해석이나 자뻑이 되었건, 나는 그마저도 개의치 않기로 했다. 그걸 정하는 건 타인이고, 타인의 해석에 의존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로 한거니까.

물론 해마다 그 해의 주제를 만족스러울만큼 이뤄내고 생각할 수 있었다고 해서 삶이 이미 끝난 것도 아니고 나라는 존재가 ‘완성’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언젠가 나는 또 다시 옹졸하고 이해라는 걸 모르는 꽉막힌 인간이 될지도 모르고, 지금의 이 생각이 오래갈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은 계속해서 회고하고, 들여다 봐야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나의 뇌는 어떤 방향으로든 계속 바뀌어 갈테니까.

2022년의 주제는, ‘부지런함’으로 정했다. 왜 부지런함이냐면 글쎄, 내가 무척 게으른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자기평가가 후한 사람이기도 하고 내가 그래왔다는 생각은 크게 들지 않는다. 단지 부지런한 사람이 되면, 나를, 내 주변 사람을, 어쩌면 세상을 더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정했다.

귀찮은 주말의 아침, 가장 일어나기 싫은 그 순간에 일어나는 게 좋다는 사실을 알아. 어느 때보다 밀려있는 집안일을 인지했을 때, 지금이라도 걸레를 손에 들고 고무장갑을 끼고 청소기를 돌리는 게 더 낫다는 사실을 알아. 부지런함이 여태까지 나를 키워왔으며, 나를 지키는 건 나의 부지런함 뿐이야. 아프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 부지런히 노력해야 해. 혼곤한 인생을 이겨내기 위해서, 나를 달래고 한 발자국 더 움직여야 해. 하지 못했던 일들을 조금이라도 더 하자, 그렇게 습관처럼 몸에 밴 부지런함으로 더 먼 미래까지 나아가자.

아직은 써놓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22년의 슬로건’이지만, 내가 불과 며칠 전에 이런 슬로건을 상상했다는 게 어떤 면에서는 의아하기도 하다. 이 문장을 적을 때의 나는, 인생이 무척 혼곤하다고 생각했나보다. 지금도 완전히 개운하게 느끼는 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난 이 삶을 아낀다.

2021년은 이해의 해, 한 해,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모두에게, 모든 순간에. 2021년의 어떤 날에는 문득, 아, 삶이 이렇게 감사한 거였구나, 세상에 이렇게 고마운 사람들이 많았구나, 그저 그 생각만으로도 너무나 가슴이 벅차서 내리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 때 내가 느낀 감정은 그 어떤 ‘쾌락’과도 다르고, 그 어떤 ‘재미’와도 달랐다. 세상을 살면서 내가 알아야할 ‘모든 것을 이해해버린’ 참 똑똑한 사람이 된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내가, 계속해서 그 감사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오래오래, 더 자주 간직했으면 좋겠다는 마음 뿐이다.

2022년은 부지런함의 해, 올해도 잘부탁합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을 알게되어 기쁩니다.